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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식용 반대?

 지금 서구사회에선 한국의 개 식용 문화에 대한 비판적 움직임이 개인의 의견을 넘어 캠페인의 형식을 취한 좀 더 조직화된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다. 인간의 오랜 친구이며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에 대한 예의와 동반자적 관계에 대한 비 윤리적 행태에 대한 당위성을 기반으로 평창 동계올림픽 보이콧의 움직임까지 그 수위가 도를 지나치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마치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이들이 참혹하게 살해된 개를 식용하는 문화의 유일함인냥 말이다.

 

 한 사회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 사회가 지나온 역사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광합성을 하지 않는 지구상의 생물들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먹어야 한다는것이다. 살생이 필멸자의 생존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되며 이성을 가진 인간은 심지어 살생한것에 대해 좀더 살생의 만족을 얻기위해 요리라는 과정을 개발해 내고야 만다.

 

  그렇다면 개의 부분으로 넘어가보도록 해보자. 인간의 생존수단이 살생에 기인한것이기에 살생의 방식에 가치관을 더하게 되는데 우리는 이러한 과정에 대해 본질적 효율성의 재고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효용이 높은 동식물에 대해선 살생의 당연함에 좀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그들이 살생 되어야함에는 별다른 이견을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한 가치관으로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효용이라는 가치에 개 식용을 평가하자면 서구사회에선 단백질 공급원으로서의 다른 종들에 비해 나을것이 없는 바꿔 말하면 더 나은 대안이 있고 식용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행위로서 결론을 내리게 된다. 돼지, 닭, 소등 다른 대안의 살생대상이 충분히 많았다는 이야기이다. 반면 단백질의 공급대안이 극히 부족한 과거 우리 사회에서는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개식용은 서구사회의 돼지, 닭, 소 만큼의 가치를 지니게 되고 높은 가치를 지닌 먹거리에 대해서 먹고있다는것은 결코 부끄럽거나 잘못된 이라는 가치판단이 개입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이는것이 사실이다.

 

 누군가는 지금 이렇게 먹을 것이 많음에도 개를 식용해야 하는 것에 대한 비인간적 행위에 대해 야유를 보내지만 원래부터 먹어왔던 식품에대해 그들만의 잣대로 평가받기엔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함의 표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것이 되는것이다. 학대와 비인간적 사육방식에 대해 최소한의 존중이라는 방식의 접근이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을거 같다. 지구 역사상 가장 많은 동족 살육과 동족 약탈, 그 결과물로써 얻은 잘 사는 나라라는 타이틀, 그것이 미개함과 존귀함의 가치판단 기준이라면 개에 대한 사랑보다는 인간에 대한 속죄가 선행되야 할 것같아 보인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길 인간의 의식은 언어의 지배를 받고 언어로서 그들의 의식을 표현한다고 하였다. 즉 그들의 가치판단은 그들이 알고있는 범주내에서만 이루어 지며 다른것(Difference)과 틀린것(Wrong)의 다른점을 인지하지 못하는 그들의 의식세계의 표현이 되는 셈이다. 오만한 관용과 오만한 비판에서 오만을 떨어내고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그들의 가치관에 하루빨리 깃들길 바라며 되새겨주고 싶은 격언으로 글을 마무리 할까 한다.

 

"know thyself"